성동구는 '도성의 동쪽'
성동구는 도성의 동쪽이라는 뜻으로 북위 37° 31 ~37° , 동경 127° 04 상에 위치하고 있으며, 동서간 6.02 km 연장거리며, 한강 북안에 위치하고 있다. 성동구의 지질은 북서부 일대에는 주라기말에 생성된 대보화강암(서울화강암)이 한강유로와 중랑천및 청계천변을 따라 제4기 충적층이 통서로 길게 분포하고 있으며 뚝섬일대의 동남쪽에는 홍적세 기간중 한강의 범람에 의해 형성된 홍적층으로 이루어져 있다. 전지역이 100m이하로 중랑천과 청계천이 흘러와 합류하여 다시 한강본류에 유입하면서 생겨난 범람원에 해당하는 저지임으로 시가지 발달과 교통발달에 유리한 지형조건을 가지고 있다.
또한 성동구는 인구 30만여명이 더불아 살아가고 있으며 근대화의 물결이후 많은 변화를 거치면서 서울의 특색있는 지역으로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서울의 부도심권으로서 동호대교, 성수대교가 구의 남쪽에서 한강을 가로지르고 있으며 지하철 2,3,5호선, 분당선, 경의중앙선이 통과하는 우리 성동구는 강남지역과 강북지역을 잇는 도심의 관문 역할을 하고 있다.
특히 왕십리역을 중심으로 남부지역은 성수 1.2가동 지역은 서울에서는 드문 준공업지역으로 중소기업이 밀집되어 (약1,350개 공장 산재)구민들의 고용기회를 넓혀 주고 있으며, 중랑천과 청계천에 유입되는 왕십리, 마장, 용답 지역은 교통과 상업의 중심지로 날로 발전을 거듭하고 있다. 이밖에 우리나라 최초의 수원지가 뚝도에 있으며 성종 13년에 완공한 살곶이다리가 있어 근대화 이전의 일면을 엿볼수 있다. 또한 중량하수처리장, 구뚝섬 경마장, 체육공원 등이 있어 주민들의 다양한 주거.생업.휴식공간으로의 역할을 모색하고 있다.
성동구는 서울특별시의 25개구의 구(區)중 서울의 동부 한강 북안에 위치한다.
남쪽경계는 한강에 접하고 있으며 이 한강을 경계로 강남구와 접하고 있다.
동쪽으로는 광진구와 접하고 북쪽으로는 중랑구, 동대문구 용두동 · 신설동과 접하고 있다.
서쪽으로 중구의 황학동 · 신당동, 그리고 용산구의 한남동과 접하고 있는 자치구(自治區)이다.

성동구의 발자취와 옛모습
광희문에서 뚝섬까지 끝없이 펼쳐졌던 이 넓은 들녘에는 이미 구석기시대로부터 사람이 살았고, 백제, 통일신라, 고려시대에는 각 왕조의 요충지였다. 조선왕조 500년 동안에는 도성의 동교(都城의 東郊)로서 목마(牧馬)와 연병(練兵)으로, 강원 · 충청 · 경상 3도로의 주요 교통로로 이용되던 곳으로 한강 주변 여러 곳의 아름다운 경치를 갖고 있는 고장이다. 전관평(箭串坪)에는 국초부터 큰 목장을 두어 군마와 파발마도 사육하였다. 봄, 가을에는 말탄 군졸들의 열병과 연습도 하였던 곳이다.
왕십리평(往十里坪)은 흥인문밖 5리쯤에 있는데, 거주하는 백성들이 무, 배추류를 심어 생활하였다. 한강변에는 뚝섬, 두뭇개 등의 나루가 있어 사람과 물자를 실 어 날랐다. 강원도로부터는 목재와 땔감이, 충청 · 경상도로부터는 식량과 잡화가 몰려 들었다.
특히 드뭇개 뒷산 저자도와 압구정이 내려다 보이는 언덕에는 독서당(讀書堂)이 세워져 조선왕조를 지탱한 많은 준재들이 학문연마에 여념이 없었다. 그리고 여기 저기 농촌 취락들이 산재하여 나름대로는 여유있는 생을 영위해 갔으니 조선왕조 시대까지의 이곳 동교(東郊)는 한없이 평화로운 고장이었다.
평화롭기만 하던 이곳 동교의 땅에도 근대화의 물결은 예의없이 불어닥쳤다. 임오군란 때 왕십리 일대에서 겪었던 참변, 이 나라 안의 최초의 상수도 수원지(上水道水源池), 일본인과 일본 식민주의 침입, 경원선 철도와 왕십리역, 신당동, 왕십리동 일대의 문화주택들 그리고1943년 6월10일의 성동구 신설, 중일전쟁과 태평양 전쟁, 개항기, 일제강점기를 통해 동교가 변화는 했지만 일제말기만 하더라도 이 일대에는 시가지의 몇 배가 되는 농경지가 있었고, 왕십리, 사근동에는 넓은 미나리 꽝을 허다히 볼수 있었다.
오늘의 성동구
성동구가 오늘의 발전을 가져온 것은 광복 이후 특히 6 · 25사변을 겪고 난 뒤의 일이다. 인구가 급격히 늘고 많은 제조업체가 입지하고, 대학과 중 · 고등학교가 들 어섰다. 한강이 정비 · 개발되고 교량이 연이어 가설되고 뚝섬 수원지가 확장되고 경마장이 생겼다 없어진 뒷터는 체육공원이 되고 지하철이 달리고 고층 아파트가 들어서는 등 빠르게 변모한 것이 지난 50년간의 성동구 모습이었다. 행정구역에도 변화 · 발전의 물결은 당연히 몰려 왔다. 1970년대 중반기의 성동구는 천호 · 영 동의 2개의 출장소를 거느려 면적이 184.3k㎡로서 서울시 전역의 30.4%를 점했던 일도 있다. 그러나 그 후 하나씩 하나씩 독립하여 강남, 서초, 강동, 송파, 광진구 가 되었으며, 각각 독자성을 지닌 자치구로 성장 · 발전하였다.
오늘날의 성동구는 이렇게 서울 동교(東郊)의 알맹이가 남아 있을뿐 아니라 가장 특색있고 변화가 많은 지역을 형성하고 있다.
서울의 큰 하천인 중량천, 청계천의 유역인 왕십리, 마장, 용답 지역은 교통과 상업의 중심지로 자리 잡혔으며 특히 용답동은 중고자동차 매매센터 집합상가로 서울 의 대표적 중고자동차 유통을 담당하고 있다. 금호, 옥수, 행당, 응봉동 등 서부지역은 노후하고 불량한 주택이 많았으나, 재개발, 재건축사업을 통해 남쪽의 한강변을 바라보는 쾌적한 주거지로 변화가 계속되고 있다. 교통면에서 국철과 서울지하철 2, 3, 5호선, 분당선이 통과하고 있어 서울 동북부의 강북, 강남을 연결하는 교통 중심지역으로 부상하고 있으며 성수동 지역 에는 준공업지역으로 1,500여개의 중소기업체가 밀집되어 있어 정보통신의 집합지로 발전되어 풍요로운 내일을 위한 지역경제를 이끌어가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