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십리 1동

  • 왕십리는 무학대사와 관련된 전설로 잘 알려져 있으나 이곳이 도성으로부터 십리 떨어진 거리에 있었기 때문에 (성저십리; 城底十里) 답십리와 같이 왕십리라는 동명이 생겨 났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고 상왕십리는 왕십리를 양분하여 위쪽에 자리 잡고 있음으로 상왕십리로 칭한 것이다.
  • 조선시대에는 한성부 성밖 10리에 속했으며, 영조 27년(1751)에는 한성부 동부 인창방 왕십리라 했으며 고종 2년(1865) 「육전조례」에 의하면 왕십리는 1 · 2계가 되어 상왕십리 지역은 왕십리 1계가 되었으나 갑오개혁(1894) 때 다시 왕십리계로 통합되었다. 1922년 경기도령 제3호에 의해 경성부 인창면에 속했으며 1914년 경기도고시 제7호에 의해 부제(府制)를 실시하면서 서울을 축소시키고 여러 동을 통합하여 자의로 각 동명을 만들 때 경기도 고양군 한지면 상왕십리라 하였다. 1936년 조선총독부령 제8호에 의하여 경성부에 편입되어 상왕십리정으로 개칭되었으며 1943년 총독부령 제163호에 의하여 성동구 관활 내에 속하였다.
  • 1946년 군정법령 제108호에 의해 경성부를 서울시로 고치고 이어 서울시 헌장 제1조에 의하여 일제식 동명을 모두 없앨 때 상왕십리동으로 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왕십리 2동

  • 왕십리로 통칭되던 지역으로 왕십리를 양분하여 이곳이 아래쪽에 자리 잡고 있다 하여 하왕십리로 된 것이다. 조선시대에는 동부 인창방 왕십리였다.
  • 1911년 경기도령 제 3호에 의해 경기도 한지면에 속했으며 1914년 경기도고시 제7호에 의해 경기도 고양군 한지면 하왕십리로 하였다. 그 뒤 1936년 조선총독부령 제8호에 의해 경성부 구역 확장에 따라 경성부에 편입되어 하왕십리정으로 되었으며 1943년 총독부령 제163호에 의해 성동구에 속하였다.
  • 1946년 서울시 현장 제1조에 의해 일제식 동명을 모두 없앨 때 하왕십리동으로 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도선동

  • 통일신라 때 비기도참설(祕記圖讖說)을 주장한 도선대사가 무학봉에서 수도했다는 전설에 따라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하며, 또 조선 개국 때 무학대사가 태조의 명으로 도읍지를 물색하던 중 왕십리에 와서 지세를 살피고 있었는데 소를 타고 지나던 한 노인이 무학대사를 보고 서북쪽으로 10리를 더 가라는 지시를 하였다. 바로 이 노인이 도선대사로서 그가 현령(顯靈)하여 무학대사에게 가르쳐 주었기 때문에 동민들이 도선대사의 이름을 빌어 도선동이라고 명명했다고도 한다.
  • 조선시대에는 한성부 성저 10리에 속했으며, 영조 27년(1751)에는 동부 인창방(성외) 왕십리에 속했으며, 갑오개혁(1894) 때에는 한성부 동서(東署)인창방 왕십리계 단지동이 되었다. 1911년 경기도령 제3호에 의해 경기도 고양군 한지면에 속했으며 1914년 경기도고시 제7호에 의해 고양군 하지면 하왕십리에 속했다. 1936년 조선총독부령 제8호에 의하여 일제식 명칭으로 변경함에 따라 경성부 하왕십리정이 되었다가 1943년 총독부령 제163호에 의해 성동구 하왕십리정이 되었다.
  • 1946년 일제식 동명을 모두 없앨 때 하왕십리동에 속해 있었으며 1963년 서울특별시조례 제353호에 의해 하왕십리동에서 분동, 도선동이 되어 오늘에 이른다.

마장동

  • 조선초기로부터 말을 기르던 양마장이 이곳에 있어서 마장안, 또는 한자명으로 마장내(馬場內), 마정리(馬場里)라 한 것이 동명으로 된 것이다.
  • 조선시대에는 한성부 동부 인창방에 속해 있었으며 영조 27년(1751)에 나온「도성삼군문분계총록」에 의하면 동부인창방 마장리계였으며, 갑오개혁(1894) 때에는 동서(東署)등소문외계 마장리라고 하였다.
  • 그 뒤 1936년 조선총독부령 제8호에 의해 경성부 행정구역 확장에 따라 경성부로 편입되면서 일제식 동명인 마장정이라 하였으며 1943년 조선총독부령 제163호에 의하여 성동구에 속하였다.
  • 1946년 일제식 동명을 모두 없앨 때 마장동으로 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사근동

  • 청계천을 끼고 있는 사근동의 동명은 신라 때 세워진 사근사(沙斤寺)가 현재의 한양대학교 축구장 부근에 있었기 때문에 유래되었다.
  • 조선초기에는 한성부 성저십리(城底十里)에 속했던 사근동은 갑오개혁(1894) 때 한성부 동서(東署) 인창방(성외) 사근리로 나타나고 한일합방 후 1911년 4월 1일(경기도령 제3호)에는 일제가 경성부 인창면 사근동이라 칭하였다.
  • 얼마 전까지도 사근동은 미나리와 채소가 많이 재배되었던 곳으로 알려짔으며, 현재한양대학교가 세워진 곳에 [치마바위]라고 하는 치마를 두른 모양의 큰 바위가 있었다. 이 치마바위는 일제 때 도로 확장을 하면서 폭파되었는데 붉은 피가 흘러 공사를 중지했다는 설도 있고, 또 이곳이 풍수지리설에 의하면 화산이 되므로 화재 예방책으로 이 바위에 검은 칠을 했다고도 한다. 그러나 이 바위 위에는 한양대학교 미술대학이 세워져 있다.

행당동(1 · 2동)

  • 갑오개혁(1894)때부터 칭해 내려온 것으로, 행당초등학교 동쪽산 일대 아가씨당(堂)이 위치한 곳에 옛부터 살구나무와 은행나무가 많이 심어져 있어서 붙여진 이름, 조선초에는 한성부 성저 10리에 속했는데 이 마을이 질펀한 들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진펄리 또는 진팔리라 하였으며 영조때에는 한성부남부 두모방 신촌리계에 속했으며, 갑오개혁(1894) 때에는 한성부 남서(南署)두모방(성외)신촌리계의 행당리동 · 전관1 · 2계의 전관동으로 되었다.
  • 1911년 경기도령 제3호에 의하여 경성부 두모면 행당리 전관동으로 되었으며, 1914년 경기도고시 제7호에 의해 경기도 고양군 한지면 행당리 전관동이 되었다. 그 뒤 1936년 조선총독부령 제8호에 의하여 경성부에 소속시켜 행당정이 되었으며 1943년 총독부령 제163호에 의해 앞서 동대문 출장소가 동대문구와 성동구로 나뉘어 행당동은 성동구에 속하였다.
  • 1946년 서울시헌장 제1조에 의하여 일제식 동명을 모두 없앨 때 행당동이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응봉동

  • 응봉동의 동명은 응봉동 남쪽에 위치한 응봉산의 이름을 따서 붙인 것이다. 응봉의 산 이름은 산 모양이 매처럼 보이기 때문에 붙여졌다. 또는 조선시대의 역대 왕이 이곳에서 매사냥을 하였기에 매봉이라고 하였다 한다.
  • 이곳은 조선 초부터 한성부(漢城府) 성저십리(城底十里)에 속하였으며, 조선 중엽 영조 27년에 나온 수정책자(守城册子)『도성삼군문분계총록(都城三軍門分界總線)』에 의하면 남부(南部)두모방(豆毛坊)신촌리계(新村里契)로 나타나 한성부 5부에 속하였음을 알 수 있다.
  • 이곳은 한일합방 이후 경성부(京城府) 두모면(豆毛面) 신촌리(新村里)로 불리다가 1914년 4월 1일에는 경기도 고향 군에 속하여 한지면(漢芝面) 신촌리(新村里)로 개칭되었으며 1936년 구제도(區制度) 실시에 따라 성동구에 속하였고 해방이후 일제식 동명 일소에 따라 1946년 10월1일 음봉동으로 개정되어 현재에 이른다.
  • 응봉동 지역이 조선시대『신촌(新村)』즉 새말이라고 부르게 된 까닭은 살곶이다리 부근에 있던 집 10여호를 매봉 밑에다가 새로 터를 잡아 이전하였다 하여 새말 또는 한자로 신촌(新村)이라고 하였다.

금호동(1 · 2 · 3 · 4가동)

  • 옛날 이곳에서 선철(銑鐵)을 녹여 무쇠솥, 농기구 등을 주조했으므로 무쇠막 무시막 또는 무수막이라고 했는데, 이름 한자명으로 수철리(水鐵里)라고 하였다. 수철리란 동명은 현 마포구의 신수동, 구수동도 수철리라 부르고 있어서 이와 구분하여 인근 주민들이 수철리의 철(鐵)에서 금(金)을, 수(水)에서 호(湖)를 인용하여 이곳을 금호, 또는 동무수막이이라고 하였다. 조선시대에는 왕십리의 배추장수와 함께 무쇠골(수철리)의 솥장수가 유명하였다.
  • 조선초에는 한성부 성지(城底) 10리에 속했으며 영조 27년(1751)에 반포된 수성책자 「도성삼군문분계총록」에 의하면 한성부 남부 두모방(성외) 수철리계였으며 갑오개혁(1894)때 남서(南署) 두모방(성외) 수철리계의 수철리동이 되었다.
  • 1911년 경기도령 제 3호에 의해 5부 8면제를 실시하면서 두모방은 두모면이 되어 금호동은 경성부 두모면 수철리라 했으며 1914년 경기도고시 제 7호에 의해 5부 8면제가 폐지되자 8면 중에 하나였던 두모면은 한지면에 병합되고, 금호동은 고양군에 편입되면서 한지면 수철리가 되었다. 1936년 조선총독부령 제8호에 의해 경성부 구역 확장에 따라 경성부에 편입되면서 금호정이라 하였으며 1943년 구제도 실시에 따라 성동구에 소속되었다.

옥수동(1 · 2동)

  • 옥정수(玉井水)라는 유명한 물이 있어 옥정숫골이라는 마을 이름이 옥수동으로 붙여진 것이다.
  • 조선시대에는 이곳을 두뭇개 · 무멧개 · 두물개 또는 두모주 · 두모포라 불렀으며 영조 27년(1751)의 기록에 의하면 한성부 남부 두모방(성외)두모포계에 속했으며 갑오개혁(1894)때에는 남서(南署)두모방(성외) 두모포계의 두모동이 되었다. 일제 점령 초기인 1911년 경기도령 제 3호에 의해 경성부 두모면 두모리라 했으며 1914년 경기도고시 제7호에 의하여 경기도 고양군 한지면 두모리가 되었다. 1936년 조선총독부령 제8호에 의해 경성부에 편입되어 일제식 명칭인 옥수정이 되었으며, 1943년 조선총독부령 제 163호에 의해 구제 실시에 따라 성동구역소 관할 아래 있었다.
  • 1946년 군정법령 제108호에 의해 경성부가 서울시로 고쳐지고, 서울시 현장 제1조에 의해 옥수정을 옥수동으로 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으며, 1975년 대통령령 제7816호에 의해 옥수동 일부가 한남동으로 편입된 바 있다.

성수동(1 · 2동)

  • 옛날 성덕정이란 정자와 뚝도 수원지(水源地)가 있던 곳이라 하여 각각 첫머리를 따서 성수(聖水)라 했다는 설과 한강을 낀 물가 마을로 한강물을 식수로 사용하는 깨끗하고 고마운 물이라는 뜻으로서 성수라는 동명이 붙었다는 설이 있다.
  • 조선시대에는 뚝섬 · 전관 · 전교 등으로 불리어 왔으며 영조 27년(1751) 수정책자 「도성삼군문분계총록」에 의하면 남부 두모방(성외)전관 1, 2계 전관동이었으며 갑오개혁(1894) 때는 남서(南署) 두모방 전관 1, 2계 전관동이었다.
  • 1911년 경기도령 제3호에 의해 경성부 두모면 독도1, 2계가 되었고 1914년 경기도고시 제7호에 의해 경기도 고양군 독도면 동독도리(현 성수동2가), 서독도리(현 성수동1가)가 되었다.
  • 그 뒤 1949년 대통령령 제159호에 의해 서울특별시 구역 확장에 따라 서울시 성동구에 편입되었으며 1950년 서울특별시조례 제10호에 의해 성수동1, 2가로 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성수동(2가 2 · 3동)

  • 옛날 산덕정이란 정지와 뚝도 수원지(水源地)가 있던 곳이라 하여 각각 첫머리를 따서 성수(聖水)라 했다는 설과 한강을 낀 물가 마을로 한강물을 식수로 사용하는 깨끗하고 고마운 물이라는 뜻으로서 성수라는 동명이 붙었다는 설이 있다.
  • 조선시대에는 뚝섬 · 전관 · 전교 등으로 불리어 왔으며 영조 27년(1751) 수정책자 「도성삼군문분계총록」에 의하면 남부 두모방(성외)전관1, 2계 전관동이었으며 갑오개혁(1894)떄는 남서(南署) 두모방 전관1, 2계 전관동이었다.
  • 1911년 경기도령 제 3호에 의해 경성부 두모면 독도1, 2계가 되었고 1914년 경기도고시 제 7호에 의해 경기도 고양군 독도면 동독도리(현 성수동2가), 서독도리(현 성수동1가)가 되었다.
  • 그 뒤 1949년 대통령령 제 159호에 의해 서울특별시 구역확장에 따라 서울시 성동구에 편입되었으며 1950년 서울특별시조례 제 10호에 의해 성수동1, 2가로 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 성수2가동은 법정동이며 행정동으로는 성수2가제1동과 성수2가제3동으로 나뉜다.

송정동

  • 이 동의 동명 유래는 문헌이나 구비설화로 전해 오는 것이 없어 그 유래를 알 길이 없으나 다만 송정동 앞에 솔마장벌 또는 양마장평으로 불리는 들판이 있는데 이곳이 양마장 솔마장과 관계가 있어 숫마장, 즉 숙말을 기르는 곳이라 하여 숫마장으로 부르던 것이 차츰 전음되어 솔마장으로 되고 그것이 다신 한자로서 송정(松亭)이라 하지 않았나 추측된다.
  • 조선시대에는 경기도 양주군 고양주면에 속했으며 갑오개혁(1894) 때에는 한성부 남서(南署)두모방(성외)전관계 장내능동이 되었다.
  • 일제강점기인 1911년 경기도령 제3호에 의해 경성부 두모면 장내능동이라 했으며, 1914년 경기도고시 제7호에 의해 경성부 행정구역을 새로 정할 때 경기도 고양군 독도면 송정리라 하였다.
  • 그 뒤 1949년 대통령령 제159호에 의해 서울특별시에 편입되어 성동구에 속하였으며 1950년 서울시조례 제10호에 의해 송정리를 송정동으로 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용답동

  • 1975년 용두동(龍頭洞) 지역과 답십리동(踏十里洞) 지역 일부가 통합되어 신설된 동이므로 머리글자인 용龍자와 답踏자를 따서 붙인 동명입니다.
  • 1975년 서울특별시조례 제979호의 동명친 및 구역 확정에 의해 동대문구의 용두동 일부와 답십리동 일부를 합쳐 용답동으로 하고 성동구에 편입시켰다. 이때 성동구의 중곡동 · 능동 · 군자동의 일부를 분할하여 동대문구 장안동으로 하고 남쪽으로 들어온 동대문구의 용두동 · 답십리동의 일부를 성동구 용답동으로 하였다.